내가 타자기를 배운 건 대학 2학년 여름 방학 때인 82년이었고 대학 은사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6년 동안을 레포트나 시험 출제, 논문 자료준비 등을 타자기로 하다가, 졸업해서 교사 발령을 받아서 근무하면서 PC라는 놈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세벌식의 시련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만능일 줄 알았던 컴퓨터란 놈이 두벌식만 쓸 수 있다는 사실을 PC를 사고 나서야 알았으니까… (당시에는 한글도 20% 정도만 쓸 수 있는 황당 그 자체의 문맹의 이기였다고나 할까?)
간단한 구조의 기계식 타자기에서 잘 되는 세벌식은 보급된 지 수십 년이 넘었기 때문에, 컴퓨터에서 쓸 수조차 없다는 점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컴 초보인 나로서는 결국 그 빠른 세벌식을 포기하고, 두벌식을 힘들게 새로 익힐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세벌식 글자판은 모든 기기에서 단일한 방식을 쓰지만, 두벌식은 불가능하다. 컴퓨터만 주로 쓰는 요즘은 기종간 글자판 통일이 얼마나 치명적인 문제인지 깨닫지 못한다.) 초중종성을 모아쓰기하는 그대로 한글을 생각나는 대로 콩볶듯이 빠르게 입력하던 세벌식 글자판에서, 자모음으로 풀어서 생각을 번역해야 입력할 수 있는 것이 두벌식 글자판이기 때문에 익히면서도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비싼 돈을 들여 산 피씨를 묵힐 수는 없으므로, 두벌식으로 2년쯤 쓰다가 공 박사님을 만나게 되고, 한글문화원 연구원으로 옮겨서도 몇 달을 두벌식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열 손가락으로 글자판을 입력하는 것은 외우는 차원을 넘어 한 달은 꾸준히 연습을 해야 바꿀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피씨 운영체계인 한글 MS-DOS가 여전히 세벌식을 지원하지 않고 있어서, 도스에서 세벌식을 쓸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세벌식으로 바꿀 수가 있었다.
그 때도 해결책은 국내 개발진들에서 나왔다. 한글2000 워드에 이어 아래아 한글이 차례로 나오면서 세벌식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도스에서만 세벌식을 쓸 수 있으면 나도 세벌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MS-DOS나 윈도즈에서 세벌식을 지원하기까지는 그로부터도 몆 년의 세월이 더 지나야 했지만, 1989년에 한글문화원에 와서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도스에서 세벌식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홍두깨(정 내권)라는 유틸리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공개하면서, 또다시 한 달을 연습하여 세벌식으로 돌아갔고, 많은 대학생 써클에서 세벌식에 대한 관심과 사용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도스에서 세벌식을 더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깃든글(양 왕성)과 한메한글(김 성수) 등이 차례로 나왔고, 나중에 윈도즈에서도 한메한글(이 창원) 등이 세벌식을 지원하면서 피씨에서 세벌식 글자판을 사용하는 데 따른 장벽은 사라져갔다.
1990년대 중반쯤에 와서 전 세계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장악한 마이크로소프트는 아래아 한글이 장악하고 있던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하여 아래아 한글의 장점을 대거 수용하면서 윈도즈에 세벌식 글자판을 비로소 지원하기 시작했고, MS사에 이어 애플사도 세벌식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돌이켜 보면, 네벌식이나 두벌식보다 훨씬 앞서 출시되어 탁월한 성능으로 타자기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세벌식 글자판은 제3 공화국에서 네벌식으로, 제5 공화국에서 두벌식으로 밀실에서 졸속으로 표준화의 된서리를 맞으며 오랜 세월 변방으로 밀려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90년대에 중반 무렵 우리 나라에 휴대폰이 보급이 확대되면서 두벌식을 변형한 천지인, 나랏글 등의 한글 입력 방식이 보급되면서 세벌식 입력 방식은 20여 년 동안 휴대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의 표준화 여론과 함께 한글문화원(원장 송 현)에서 12키 전화기용 세벌식 한글 입력 방식을 만들면서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아이폰/아이팟터치에서 세벌식 한손 입력기를 만들려고 1년 넘게 길을 찾다가 2009년 마감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날에 20년 지기인 김 성수 사장에게 개발을 부탁했더니 선뜻 맡아주겠다고 승락해 줘서 드디어 1월 18일 외부 테스터 버전을 손에 쥐게 되었다. 막상 써 보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나, 개선할 점도 많이 보였다. 초중종성을 각각 한 벌로 모아쓰기를 하는 한글은 세벌식인 것이며, 그 세벌로 글자판을 구성한 것이 세벌식 글자판이다. 따라서 세벌식 한손 입력 방식과 멀티터치 스마트폰이 만나면 새로운 차원의 한글 입력 방식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우선 당장은 “세나” 한손 입력기를 앱 스토어에 등록하여 무료로 공개하는 일부터 서둘러야겠다.
자음-모음을 각각 한 set(벌)로 된 방식을 두벌식이라 하고, 초성-중성-종성을 각각 한 벌로 된 방식을 세벌식이라 하고, 초성 1, 중성 2, 종성 1 벌로 된 방식을 네벌식이라 합니다.
글자판을 처음부터 두벌식으로 배운 사람들은 두벌식이 단순하고 좋은 줄로만 알고 삽니다. 그렇지만 두벌식으로는 기계식 타자기를 만들 수 없습니다.(그럼에도 네벌식 타자기를 글자판 배열만 두 벌식으로 입혀 놓고 두벌식 배열이라며 표준을 정해버렸죠. 컴퓨터 글자판에서는 보급에 성공했지만, 기계식 타자기로는 보급에 실패했죠.)
문자의 기계화는 1:1 대응으로 설계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가장 합리적인 방식입니다. 1:1보다 많거나 줄면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변형이 가해져야 합니다. 또한 일상적인 글자 생활 습관과 어긋나는 문제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한글을 풀어쓰기로 바꾼다면, 당연히 두벌식으로 가야 합니다.
모아쓰기를 한다면, 기계적인 입력 방식도 마땅히 세벌식으로 가야 합니다.
세벌식이 처음 배울 때 조금 더 걸리지만(두벌식이 3주에 배운다면 세벌식은 3.5~4주 정도), 익히고 나서의 길고긴 사용 기간에 비하면 무시해도 될 정도의 시간 차이고, 세벌식으로 얻어지는 장점은 상당히 많습니다. 입력 정확성도 낫고, 입력 속도도 빠르고, 오타가 나도 한 글자에서만 생기며 쉽게 어떤 글자를 오타를 냈는지 교정하기도 쉽습니다.
두벌식은 오타를 내면 두 글자가 꼬이기 때문에 “오나전”같은 유추하기 힘든 오타가 많이 생깁니다. 오나전이 무엇을 치다가 낸 오타인지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유추해 낼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등등으로 한글의 기본 구성 원리를 따르지 않은 기계화가 일으킬 수 있는 부작용은 그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갈 길이 못 됩니다.
한글 모아쓰기에 맞게 1:1 대응 방식으로 기계화하는 것이 너무 복잡하고 부작용이 많다면, 그때는 두벌식이든 네벌식이든 검토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세벌식은 이미 1949년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1960년대까지 최대의 한글 타자기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두번의 군사정권이 비전문가를 동원하여 졸속으로 무너뜨렸죠.
그래도 진리는 살아남는가 봅니다.
표준이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운 우리 나라 환경에서도 세벌식은 아직까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사용자가 생겨나고 그 장점이 공감되고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희가 이번에 스마트폰에 두루 쓰일 세벌식 한손 입력기를 개발하게 된 것입니다. 꾸준한 개선을 거쳐 세벌식, 아니 한글의 장점을 살리는 한손 입력기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은 어플 감사합니다. 무료로 공개하신다니 정말 좋은 의미를 가질것 같습니다.
테스트로 사용해보고 있지만, 종성까지 굳이 필요한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으로 빠른 입력이 가능한것인지요 ^^ 한손으로 연습하다 보니, 그런생각을
가져 봅니다.